지난 6년 반 동안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들며 개인적인 일정이고 연락이고 많이 소화를 못했다. 부족하고 서툴렀다. 요즘말로 알게모르게 널리 ‘손절’ 당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퇴사한다는 소식을 주변에 알리고 나니 예상치 못하게도 얼굴 한 번 보자는 감사한 연락들을 받아,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많이 만났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을 들으며 코웃음을 쳤었는데,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정말로 과로사하겠다 싶었다. 덕분에 즐겁게 정신없는 한 달을 보냈다.

퇴사를 결심하며, 최소 3개월은 커리어와 관련된 어떤 의사결정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지친 심신을 달래고 스스로를 들여다보는데에 충분히 시간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의 결과는 창업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 감사하게도 이런 마음을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차 한 잔 하자며 연락해주신 분들이 계셔서 뵙고 수다를 많이 나누었다. 여러 선배 창업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 정리가 되기도 하고, 고민이 부족한 영역에 대해서는 큰 숙제를 안고 오게 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얼른 뭐라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험해보고 싶은 가설, 시작해보고 싶은 일, 공부해보고 싶은 것에 대한 생각을 끊기가 어려웠다. 이 또한 중독이라면 중독이다. 근육의 성장에는 운동과 더불어 영양과 휴식이 필수적이라는데. 일하는 인간으로서의 나에게도 영양과 휴식이 필요했다. 뭔가를 멈추지 않으며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중독적인 생각에 브레이크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런던행 편도 항공권을 끊었다.

항공권과 첫 번째 숙소만을 예약하며 두 가지를 다짐했다. 하나, 적어도 2주 동안은 한국에 들어오지 말자. 둘, 미리 계획을 세워두지 말고 그때그때 마음의 소리를 따르자. 시간도 언어도 다른 곳으로 몸을 멀리 그리고 길게 보내야 마음도 제대로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더불어 이번 만큼은 효율적인 동선과 가격을 찾는 대신, 조금은 비효율적이더라도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즐거움에 귀를 기울여주기로 했다.

걱정 속에 스스로 했던 다짐들이 무색하게도 참 신나게 놀아댄 3주였다. 발 닿는대로 걸었고 런던의 여러 펍들을 쏘다녔으며 템즈강변을 달렸다. 9년 전에 머물렀던 파리의 한인 민박을 다시 찾았고 올림픽의 활기가 가득한 도시를 즐겼다. 이번 여행 최고의 순간을 꼽으라면,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며 들른 브뤼셀에서 맛본 홍합찜과 몽 데 아흐 가든 계단에서의 해질녘이 시상대의 두 자리를 차지할거다. 그리고 남은 한 자리는 충동적으로 결제한 네덜란드 F1 그랑프리에게 내어준다. 염원했던 루이스 해밀턴의 그랑프리 우승 직관은 미루게 되었지만, 백만원이 넘는 티켓 값이 아깝지 않았던 뜨거운 이틀이었다. 아름다운 운하에 비친 건물들의 그림자와 불빛이 아름다운 암스테르담에서는 물가에 걸터앉아 청어 샌드위치를 원없이 먹었다.

으레 여행에서 새로운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고, 잃었던 스스로를 발견한다고들 한다. 일하는 동안의 나에게는 그럴만한 빈 공간이 없었다. 배부른 식사는 성장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도를 지나치면 체하기 십상이며, 성장기를 지나서도 탐식하면 쉽게 비만해진다. 나는 그간 나 스스로의 상태를 살피지 않고, 무작정 채찍질을 가해온건 아니었을까.

여행에서는 한참 걷고 풍경이 좋으면 멍을 때리고 사람들을 살피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애초에 엄청나게 진지한 마음을 품은 것도 대단한 목적을 가진 것도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번 여행에서 많이 비우고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늘 뭔가를 기록하고 저장하며 의미있는 것으로 변환하고 남기느라 바빴는데 그러지 않게 되었다. 과거와는 달리, 내 앞에 들어온 것들을 그러쥐고 놓치지 않으려고 용쓰지 않았다. 그렇게 몇몇 생각들은 남았고, 몇몇 생각들은 잊혀졌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면서 남은 몇 가지 생각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한국에 돌아가도 되겠다, 언제고 다시 떠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조금은 홀가분하게 돌아올 수 있겠다. 작은 여행은 끝났지만 큰 여행은 이제야 시작한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 돌아온지, 이제 2주 넘어 3주를 향해 가고 있다. 가기 전의 조급증이 무색하게시리 돌아와서도 여유롭다. 너무 여유롭게 굴고 있어서 큰일이라면 큰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이제 여행 얘기 끝! (이면 좋겠지만 계속 할 수도 있음) 

님, 즐거운 추석 연휴 보내셨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