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촌동에 위치한 카페 '헬카페 스피리터스'에 갔다. 보광동에 있는 '헬카페 로스터스'에는 종종 갔었는데, 여기는 처음이다. 오래된 아파트의 상가 2층에 위치한 카페에 들어서자 목재로 마감된 공간과 바에 위치한 큼직한 스피커에서 흘러나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음악이 반긴다.

나는 운영 정책이 뚜렷하고 명확한 곳들이 좋다. 헬카페 스피리터스의 각 좌석에는 '이용 안내서'가 놓여있는데, 고객들이 어떻게 이 매장을 이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가 상세하다. 매장에서 어느 정도로 조용히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도 되고 무엇은 안 되는지 등등. 7번까지 번호가 붙은 안내에는 이를테면 이런 내용들이 적혀있다.

헬카페 스피리터스의 이용 안내서를 읽는 순간, 이 매장에서 얼마만큼의 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는지 예상할 수 있게 되어 아늑해진다. (이렇게 느끼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아니 화장실 마감 시간이랑 잔 수거 시간까지 적어주다니 너무 세심하고 편하잖아... 카페를 찾는 고객도 이 공간에서 일하는 직원도, 시스템과 매뉴얼이 있기에 편안하게 공간을 누리고 또 일을 해나갈 수 있다.

스타트업에 다닐 때는 '모호함'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또 많이 하기도 했었다. 넷플릭스 '규칙없음' 식의 극단적인 자율과 책임을 주창하는 회사와 사람들도 많았었다. 하지만 명확해져야 하는 것들을 명확하게 정의해두어야, 모호함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빠르게 성장하고 급변하는 테크 산업, 대중의 선호가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콘텐츠 산업이라면 전략적인 모호함과 규칙없음이 분명 필요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는 정말로 시장과 산업이 급변하기에 모호함과 규칙없음을 필요로 할 때의 이야기다. 그리고 동시에 그럼에도 그 뒤에서 꼿꼿하게 버텨줘야 하는 루틴과 규칙, 일관성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명확히 해두어야 하는 것들을 모호하게 두는 것은 책임 회피 아닌가?

헬카페 스피리터스의 경험이 내겐 참 좋아서, 이곳의 매뉴얼을 떠올리며 든 생각들을 적어봤다. (같은 맥락에서 고객에게 선택권을 너무 많이 부여하는 레스토랑을 선호하지 않는다. 만드는 사람이 생각하기에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식으로 내어주는 것이 더 멋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