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뉴욕에 사는 남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순간 가운데 하나가 바로 DTR Moment라고 하더군요. DTR은 'Define-the-Relationship'의 약자라고 합니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그런데, 우리 무슨 사이야?" 같은 상황. 

2️⃣

며칠 전에 쿠팡이 유료 회원 '와우 멤버십' 이용료를 인상한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월 4,990원이었던 멤버십 이용료가 무려 1.58배 인상된 7,890원으로 오릅니다. 멤버십 이용료만 놓고 보면, 35%가 멤버십을 해지하고 이탈해도 쿠팡에게는 재무적으로는 이득일 정도로 높은 인상폭입니다. 하지만 가격 인상을 거부할 수 없음을 깨닫는데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로켓 배송, 쿠팡 이츠 무료 배달, 그리고 K리그와 F1을 보유한 쿠팡 플레이를 포기할 수 없었거든요. 탁월한 고객 경험이라는 해자 덕분에, 고객들은 기꺼이 가격 인상을 감수합니다. 인상된 멤버십 이용료는 고객으로부터 곧 잊혀질겁니다. 아니 오히려, 더 멤버십 혜택을 많이 누리기 위해 사용량을 늘리며 충성고객이 되어갈지도요. 판단이 여기까지 미치자, 멤버십 해지는 모르겠고, 통장 잔고를 털어 쿠팡 주식을 샀습니다. (아아 이렇게 오히려 쿠팡과 더 얽혀버리고 말았다!)

3️⃣

일터에서도 비슷한 순간들이 찾아오곤 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포장으로 두르고 또 두르더라도, 일은 일이고 회사는 회사. 평가와 보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연봉 협상 시즌은 어김없이 다가옵니다. 나의 역량이며 태도며 행동거지마저도 모두 평가의 대상이라는 불편하지만 당연한 진실을 깨닫게 될 때도, 일러주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테이블의 한 쪽 끝과 다른 한 쪽 끝을 모두 경험해보며 참 많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4️⃣

개인적인 여러 인간 관계들, 공급자와 소비자, 사용자와 노동자. 그 어떤 사이가 되었든 단어 그 이상의 역학과 권력을 포함한 질문이 테이블 위로 던져지는 순간이 오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 무슨 사이야?" 결국 한 쪽은 답을 해야 하고 질문을 한 쪽은 답을 들어야겠지요. 질문하고 답을 듣는 쪽도 또 답을 해야 하는 쪽도, 서로 썩 유쾌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한쪽이 의도적으로 모호함을 고수하는 것일수도 있고, 각자의 속도가 달랐을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 우리가 어떤 역학 속에 놓여있는지를 직면하는 것은 늘 차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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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끝이 한없이 냉혹할 것을 알면서도 질문을 해 어떻게든 관계를 명확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나는 약자였던 것 같습니다. 반면 좋은게 좋은거 아닌가 라고 얼렁뚱땅 이야기할 수 있을 때는 나도 모르게 강자의 입장에 서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내가 어느 입장에 서있든, 저는 질문을 하거나 흥정을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관계를 규정하는 질문을 하는 행위 자체가 나를 그 관계의 약자 위치로 끌어내린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그저 현명하게 인내하거나, 내 방식으로 판을 뒤흔들거나, 아니면 판을 박차고 나가거나.

님에게는 언제, 어떤 DTR Moment가 찾아왔었나요?

p.s. 그나저나 글을 쓰고 보니, 제가 매사를 권력과 강약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아니라는 변명을 좀 덧붙여둬야 할 것 같은 느낌. 여러분! 저 그런 드라이한 사람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