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금요일부터 이번 주 화요일까지를 파리에서 보내고 벨기에 브뤼셀로 향하는 유로스타를 탔다. 그리고 브뤼셀에서 화수목금요일을 보내고 금요일 오후에 암스테르담에 당도해 뉴스레터를 쓰고 있다. 브뤼셀과 암스테르담은 원래의 여행 계획에는 없었다. 저가항공이나 기차를 타고 남부 프랑스나 스페인, 그리고 포르투갈로 향했거나,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로 떠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출발했었으니까.

암스테르담까지 오게 된 이유는 F1 직관. 위의 동선으로 돌다보면, 이탈리아 몬자 그랑프리를 볼 수도 있고 안 볼 수도 있고- 정도의 생각만 품고 있었다. 남은 좌석의 위치와 가격, 런던에 이어 도착한 파리에서부터의 동선 등을 따지다가 결국 파리에서 F1 티켓을 구매해버렸다. 결론적으로 참 잘한 결정이었다.

2014년 여름 즈음에 교환학생으로 지내며 묵었던 한인민박이 아직도 남아있다. 위치와 가격 모두 너무 준수해서 이 곳에 다시 묵었다. 공사와 확장을 거친 공간은 더 깨끗해졌다. 사장님은 몇 차례 바뀐 것 같지만 여전히 좋았다. 밥과 김치, 국물이 있는 아침식사와, 여러 사람들과 같은 방에서 묵고 또 거실에서 수다 떨고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한인민박만의 맛(?). 우르르 몰려다닌다면 늦은 밤도 조금은 안심이 되고 귀가길 택시비도 덜 부담스럽다.

'화이트 에펠' 하루에 단 한 번 새벽 1시에만 만날 수 있는 순간이다. 일몰 이후 매시 정각이면 에펠탑이 하얀 조명으로 반짝이곤 하는데, 에펠탑을 밝히던 기본 조명인 주황색 조명이 꺼지고, 5분 동안 하얀 조명만 반짝거리다가 모든 조명이 완전히 꺼지는 소등 시간인 셈. 우르르 강변에 앉아 맥주와 감자칩 까먹으면서 수다를 나누다가, 자정과 1시의 에펠탑을 보고 우버 타고 돌아왔다. 집 앞 일방통행 도로에 가로막혀 조금 걸었어야 했는데, 몰래 그래피티 작업을 하고 있던 흑인 무리와 조우해 재미난 구경도 했다. 너네 어디서 왔어? 영상 찍어 한국에 퍼뜨려줘! 하며 킬킬거리는 귀여운 사람들이었다.

몽마르뜨 언덕의 야경 파리를 떠나기 전날 밤에는 한인민박 사람들과 우르르 몽마르뜨 언덕의 야경을 보러 갔다. 교환학생 시절엔 몽마르뜨 언덕은 해지면 위험하니 조심하라느니, 주렁주렁 에펠탑 키링을 파는 사람들에게 호객행위 당하다보면 난처해질 수 있고 소매치기도 많다느니, 해서 칼같이 석양만 보고 내려왔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사람들과 늦은 밤까지 사크레쾨르 대성당 앞 계단에 앉아 버스킹 공연 보고 덩실거리며 춤추다 내려왔다. 아, 올림픽 기간인 지금 파리의 치안은 매우 든든하다. 경찰관들이 삼삼오오 순찰 중이고 관광지와 올림픽 경기장 근처에는 군인들도 있다. 여튼 월요일 밤을 즐기고 있는 파리 시민들과 관광객들을 보니 마음이 많이 여유로워졌다. 숨쉴 구멍들을 많이 많이 만들어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인민박 사람들 한인민박에서 예상치 못했던 즐거움은 역시 여행하는 사람들. 이 한인민박은 올림픽이 시작되면서인지 끝나고부터인지 오히려 손님이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부킹닷컴에 숙소를 올렸다고. 그래서인지 내가 당도했을 때는 외국인 몇 명이 오가는 것이 흥미로웠다. 같은 방에 있었던 K는 하와이 태생의 한국계 미국인. 가족 친지들 덕분에 한국에 대해 아는 바가 많고, 지금은 뉴욕 맨해튼에서 스타트업 HR 일을 하고 있는 그와 테크 기업 얘기, 뉴욕에서의 삶, 한국과 미국의 문화 차이 등 온갖 얘기를 했다. 스물 아홉 살이 되어 처음 유럽에 나온 J는 이번 아니면 또 언제 오겠냐는 생각으로 새벽 여섯 시면 나가서 밤 늦게야 돌아오곤 했다. 파리에서 출발하는 베르사유 투어, 몽생미셸 투어, 브뤼셀 당일 투어, 미식 투어 등을 열심히 듣는 한국인 관광객 모범생. 마이리얼트립 장사 잘 되겠구나- 생각했다. 대화할 수 있는 짧은 시간이면 K와 나는 계속 합동공격(?)을 일삼았다. 일하듯이 관광하지 말고 쉬엄쉬엄 다니라며, 동네 슈퍼마켓과 시장도 가보고, 이번에 못가면 다음에 또 와야겠다 생각하라며. 지금쯤 로마 어드메에 있을 J가 조금은 여유롭게 여행하고 있기를 바란다. 

파리를 떠나기 전날이었던 월요일 낮에는, 눈여겨봐두었던 기념품들을 사고 쇼핑도 하려고 나섰다. 길거리 표지판을 보다보니 예전에 왔던 보주 광장 근처인지라 슥 들렀다. 빅토르 위고, 리슐리외의 집이 있기로도 유명한 이 광장.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 대칭 맞춰 구획해둔 잔디밭과 네 꼭지에 위치한 분수들, 광장 한가운데 높이 솟은 나무들이 모두 아름답다.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고 낮잠을 자고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떠나면 이 풍경을 또 한동안 못 보겠구나 생각하며 눈에 담았다. 아마 다시 와도 지금과는 다른 느낌이겠지 생각하며, 이 순간을 오래오래 담고 기억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파리를 떠나 브뤼셀로 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지만 동시에 끝까지 망설인 결정이기도 했다.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F1 그랑프리 티켓을 예매하고 나니, 파리에서의 일정과 암스테르담에서의 일정 사이가 조금 애매해진 것이었다. 그렇다고 둘 중 한 곳에 너무 길게 머무르기는 좀 싫었고. 이것저것 검색하고 둘러보다가, 결국 이정도까지 찾고 둘러봤음에도 더 좋은 답이 안 나왔다면 순리에 따르는게 맞다고 생각하며 그 중간인 브뤼셀행 열차와 숙소를 예약했었다.

브뤼셀에 당도한 첫 날엔 마침 비가 추적추적 왔고, 도시의 첫인상은 뭔가 애매했다. 짐을 풀고 잠깐 멍때리다 그래도 저녁은 먹고 자야지 하며, 브뤼셀 명물이라는 홍합찜을 파는 레스토랑을 찾아 들어가 음식을 시켰다. 이게 왠걸.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사장님들 사이에서 오랜만에 맛보는 뜨끈한 수프와 알알이 통통한 홍합을 정말 흡입하듯 먹었다. 소울푸드라는 단어는 이런 음식에 붙이는 것이었지. 다음 날 브뤼셀 시내를 걷다가 마주친 몽 데 아흐 가든.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의 맨 윗 계단 한가운데에 앉으면, 정원의 전경과 동상의 뒷모습, 그리고 브뤼셀 시내가 일직선으로 정렬되는 짜릿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브뤼셀에 온 두 번째 날 저녁, 여기에 앉아 버스킹 공연 들으며 한참을 멍때렸다.

돌이켜보면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브뤼셀에 올 계획이라곤 없었다. 실은 출발 직전까지도 파리에 좀 더 길게 있을걸 하며 전전긍긍했었다. 그 모든 것이 무색하고 멋쩍게시리 날씨도 사람들도 음식과 술도 이 도시의 풍경과 분위기도 다 좋았다. 이 도시와의 예상치못한 새로운 만남을 느끼는 순간이 참 반가웠다. 더불어 사실 이미 그간 내 주변에도 이미 많았을 좋은 순간들을 온전히 잘 담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여행을 떠나지 않고도 떠나온 것처럼 살고, 여행을 떠나서도 그 곳에 살던 양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암스테르담에서의 일정은 아직 F1에 집중되어 있다. 금요일 도착, 토요일 퀄리파잉 (일요일 경기에서의 출발 순서를 결정하는 기록 경기), 일요일 본 경기. 이 메일을 쓰고 본 경기를 보러 간다. 님, 제가 뉴스레터에 이만큼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주세요(?)

토일요일 경기를 좋은 자리에서 보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냈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설령 오더라도 이 날 이 순간은 아닐테지 생각하니 돈이 아깝지 않았다. 어제는 비가 많이 와서 판초 우의를 덮어쓰고 행군하듯 서킷까지 걸어갔다. 물에 빠진 생쥐 꼴로 계단을 올라섰는데, 역시나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각 팀의 피트와 출발하는 차량들, 드라이버들과 피트 크루들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자리에서 토요일 연습 주행과 퀄리파잉을 살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님 마음이 여유로워져서 그런 것인지, 예전보다 조금 더 쉽게 감동받고 또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들이 많아진 것 같기도 하다. 이번 여행에서도 그런 순간들이 참 많았는데, F1 네덜란드 그랑프리의 스탠드에 들어선 순간, 그리고 레이스카들이 질주하는 걸 눈앞에서 본 순간들이 모두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조만간 다른 경기도 볼 수 있길.

여행의 2주차에 접어들면서 두루두루 마음이 많이 너그럽고 여유로워졌다는 생각을 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사소한 수다를 떨고, 농담과 친절을 주고받고, 뭐가를 베풀고 받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마음에도 머리에도 여유공간이 생겨서 뭔가가 들어오고 나가는게 불편하지 않다. 반대로 예전같으면 싫고 예민했을 장면들도 대충 넘기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싫지 않다. 비일상적인 시간과 장소에 나를 떨어뜨려둔 덕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시간을 늘 전력을 다해 지냈다. 몸과 마음은 녹초였고 덜 너그럽고 덜 여유로웠다. 돌아가서 어떤 일을 하게 된다한들, 조금은 너그럽고 여유로운 사람으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더불어 주기적으로 그리고 일정 수준 이상의 긴 시간을 여행에 쓸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은 메타인지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이 모든 것이 호사로운 삶이라는 것을 잘 안다. 호사롭기 위해서 더 영리하고 집요해야 하겠다.

계획도 목표도 없는 여행을 떠나온지 2주가 넘었다. 2주 넘게 여행해보는 것 자체가 목표라면 목표였는데 이미 달성을 해냈다. 한결 여유로워짐을 몸으로 느끼고 있고, 또 다음 여행에 대한 욕망 또한 생겼으니, 슬슬 돌아갈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 여행은 곧 끝나지만 더 긴 여행은 이제야 막 시작된 것 같다는 신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