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밤에 암스테르담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서 금요일 오후에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아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3주 동안 세워둔 차는 다행히 아직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아 시동이 잘 걸렸다. 오랜만에 하는 운전이 조금 조마조마했지만, 다시 금새 적응하며 집에 잘 당도할 수 있었다. 떠날 즈음에 에어컨을 안 껐었나? 식물이 죽어버렸음 어떡하지? 도둑이 들었으면 어떡하지? 같은 걱정을 잠시 했었다. 다행히 집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시차 적응에 꽤나 애를 먹고 있는 걸 제외하고는 (덕분에 나는 솔로 22기 정주행 완료) 일상에 적응 중이다.

조급함은 언제나 일을 그르친다. 떠나기 직전을 돌이켜보면 비즈니스 관점에서 얼른 이거 해봐야지 저거 해봐야지 하며 안달을 냈던 것 같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은 그런 조급증이 많이 사라졌다. 머리도 마음도 많이 비웠다. 찬찬히 그리고 조금 더 본능적으로 움직여볼 수 있으면 좋겠다싶은 요즘이다.

매일 많이 걸으며,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가벼워질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묵직하게 챙겨 돌아온 짐들 가운데는 한 번도 꺼내입지 않은 티셔츠, 써보지도 않은 헤어 드라이어 같은 것들이 있었다. 알차게 챙겨온 짐은 이동의 선택지를 줄였고 피로도를 높였다. 더 오래 멀리 가려면 가벼워져야 한다. 비단 여행 뿐만이 아닐테다. 어디에 욕심을 부릴 것인지, 그리고 어떤 것들은 중요치 않다고 판단하고 잘라낼 것인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해봐야 하겠다.

그득그득 찬 머리를 비워내는 데에는 여행만한 것이 없구나 생각했다. 아마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은 이미 훨씬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을 것. 하지만 근 몇 년간 일만 해오다보니, 내게는 이런 휴식의 시간이 잦지 않아 이제야 깨닫는 것 같다. 언어도 지리도 불편한 환경에 떨어져 평소 쓰지 않았던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시간들, 그리고 그런 덕분에 어느 순간부터 이 곳 사람들의 일상을 좀 더 여유롭게 깊이 관찰할 수 있게 되는 순간들이 참 좋았다. 조금 더 자주 그리고 길게 여행을 올 수 있었다면, 오랫동안 퇴적되어 온 낡은 마음과 믿음들을 더 빨리 새 것으로 교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떻게 하면 더 자주 길게 여행을 올 수 있을까. 또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것처럼 살 수 있을까.

그 연장선에서, 더 큰 흐름을 만들고 그 흐름 속에 있어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결국 내가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은 흘러간다. 좁은 냇가에 앉아서 졸졸 흐르는 물을 어떻게든 가두려 했던 것 같다. 지나간 것들을 붙잡으려 들고 버리지 못하고 미련을 가지는 대신, 좁은 냇가를 큰 강의 물줄기로 바꾸려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써야지. 여러 의미로, 더 넓고 깊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외에도 글로 다 못 쓸 사소한 생각들이 많았다. 아직 유럽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던 - 가장 최근에 헤어진 애인이 생각나는 순간들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에 부모님과 여행을 한 번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암스테르담 운하에서 유유자적 노는 젊은이들을 보며 보트를 모는 법을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에 긴 여행을 떠난다면 전 지점 액세스가 가능한 공유 오피스 멤버십을 결제해두면 어떨까 고민했다.

여러 많은 생각을 했지만, 어떤 생각들은 흘러갈 것이고 어떤 생각들은 남을 것이니 깊이 연연하지 않는다. 많이 비워낼 수 있어서 즐거운 여행이었다. 통장 잔고도 덩달아 줄어든 것이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