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7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2022. 7. 9.

🎞️ EP.7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이기적인 유전자』의 저자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유전자라는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도록 맹목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생존 기계이자, 운반자로서의 로봇이다."

이 말은 매우 비정하게 들릴 수 있으나, 어찌 보면 묘하게도 참 위로가 되는 말이다. 이 말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고귀한 목적을 이루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존재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주어진 소임을 다한 것이다.

- 박권,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요즘 사는 이야기 (feat. 왜 벌써 EP.7 이냐구요?!)

지난 달에 말씀드렸듯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뉴스레터를 보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EP.7로 찾아왔습니다. 트레바리 클럽 '성장 곱하기 성장'에서 다룬 책 뿐만 아니라 다른 클럽에서 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도 편히 나눠볼까 싶어요.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다른 트레바리 클럽에 멤버로 가입해서 읽어본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지난 뉴스레터에서 간략히 소개했던 그 클럽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흠모하던 분을 클럽장으로 모실 수 있어 기뻤고, 아니나다를까 첫 모임부터 무척이나 즐겁고 의미있는 경험이라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라고 썼었네요.)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 판타지와 SF 등 장르문학 도서를 무척 즐겨읽었었는데요. 어떤 분야에 애정을 갖게 되면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보게 됩니다. 그렇게 한국 판타지 소설 1세대 작가들의 책들을 탐독해나가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서도 유별나게 재미나게 읽은 한 소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가 관심을 가질 때쯤에는 이미 절판된 책이라 약간 손때가 탄 A급 중고를 어렵게 구매할 수 있었는데요. 즐겁게 책을 읽고는 작가가 직접 개설한 커뮤니티에 접속해 새롭게 연재한 3부를 읽기도 하고, 팬들이 서로 질문을 주고받으며 소설 속 세계관을 확장시켜나가는 것을 흥미진진하게 보기도 하고, 하다가 고등학생이 되고 수험 생활을 하고 대학에 입학하면서 장르문학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졌던 것 같습니다.

저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생활을 시작해 2018년에는 세 번째 회사로, 스타트업인 트레바리에 입사했습니다. 그리고 2021년 나온 책들 중 배틀그라운드를 출시해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게임회사 크래프톤(구 블루홀)의 이야기를 다룬 『크래프톤 웨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절절하게 공감하기도 하고, 또 많이 배우기도 하고, 또 아 나의 힘듦은 아직 견딜만한 힘듦이구나, 하기도 한다는 그 책 중에서도 무척이나 재미있는 꼭지 아래에서 ("재미와 흥행의 상관관계"), 어렸을 적 재미나게 읽었던 책을 쓴 바로 그 소설가가 등장합니다.

(책 『크래프톤 웨이』 속 구절과 그에 대한 코멘트를 본인이 직접 블로그에 포스팅하셨기에 링크를 남겨둡니다. 이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재미나게 읽으실거라 생각합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이 분의 SNS에 소심하게 친구 신청을 했는데, 너그럽게도 받아주셨습니다. 올려주시는 글들을 읽다보니 왠지 다독가이시고 트레바리 클럽을 재미있게 이끌어주실 것 같았습니다. 은퇴하면 작은 작업실을 내고 세미나를 열고 싶다는 포스팅을 읽다가, 클럽장으로 모시면 제격이겠다 싶어 담당팀에 구구절절 섭외 요청을 드린게 2021년 7월이었습니다. 섭외와 기다림 끝에 올해 6월부터 클럽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트레바리 클럽 인생에 보탬은 안되지만 6월 첫 번째 모임에서 함께 읽은 책의 제목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였습니다. 판타지 소설을 탐독하던 중학생이 흠모하던 소설가는 게임을 개발하는 디렉터가 되었습니다. 그 중학생은 자라나서 독서모임 스타트업에 입사하고, 게임 스타트업을 다룬 책을 읽다가 게임 디렉터가 된 소설가의 이름을 찾아냅니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게임 디렉터는 독서모임의 클럽장이 되었습니다. 저 혼자 내적으로나마, 괜히 신기해하기도 뿌듯해하기도 한 순간이었습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네요.

그 외에도 요즘 사는 이야기에는 뭐가 더 있냐 하면-

늘 그렇듯 무척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뜬금없고도 뒤늦게 코로나에 확진되었습니다. 내일 자정 격리 해제 예정.
가끔 아무 생각없이 운전을 합니다. 운전 재밌다!
넷플릭스 F1:본능의 질주를 보고 있습니다. 레드불 레이싱 팀의 팬이 될 것 같습니다.

책을 읽고나서 결정론과 자유의지에 관해 떠올린 생각들

1.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며

혼자였으면 읽지 않았을 책을 함께 읽는 것이 트레바리 독서모임의 즐거움이 아닐까요. 그러니 '인생에 보탬은 안되지만'이라는 너무나 호기심이 동하는 클럽명과 책 선정들을 보고는 가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첫 책은 심지어 양자역학을 다룬 책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라니. 과학을 쉽게 설명해주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이 유튜브나 교양 프로그램을 통해 여러 영역을 설명해주시곤 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궁금했던 키워드인 양자역학!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클럽을 결제하고 책을 사다 읽었습니다.

문송한 마음으로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공식 유도 부분이나 난이도 높은 과학 원리에 대한 설명을 빠르게 흘려보냈습니다. 스스로의 지적 한계를 깨닫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론과 자유의지'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생각을 뻗어갈 수 있어 즐거운 독서였습니다. 아마 이번 독서와 독후감 쓰기가 주는 고통은 태만하게 보내었던 중고등학교 시절 특히 과감하게 문과를 선택하고 수학을 제끼던 10대 시절에 이미 결정되어버렸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양자역학에 대한 오기가 생겼음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과학과 철학, 그리고 역사에 대한 책을 더 많이 또 깊이있게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이미 첫 모임도 전에 얻은 것이 참 많네요.

2.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

변하지 않는 사실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불변하는 물리법칙의 후보 중 하나인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했습니다. "열역학 제2법칙이 말해주는 바는 무질서도가 항상 증가한다는 것이다. 방은 저절로 깨끗해지지 않고, 우리는 젊어지지 않으며, 모든 것은 닳아없어진다."

삶에 대한 기대치를 과도하게 높이 매길 필요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유전자라는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도록 맹목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생존기계이자, 운반자로서의 로봇이다."라는 리처드 도킨스에 대한 인용과 그에 대한 저자의 감상이 따뜻하게 다가왔습니다. "이 말은 매우 비정하게 들릴 수 있으나 어찌 보면 묘하게도 참 위로가 되는 말이다. 이 말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고귀한 목적을 이루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존재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주어진 소임을 다한 것이다."

더 나아가 책의 4장에서는 "물리학에 따르면, 초기 조건이 주어지면 모든 입자의 동역학은 물리법칙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된다. 그렇다면 원칙적으로 우주의 운명도 초기 조건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기계론적 세계관 또는 과학적 결정론이라는 관점이다." 라고 말합니다. 앞서 적은 바와 같이 우리 삶의 요소요소가 모두 결정되어 있다고 느끼게 합니다. 아둥바둥거리며 살다가도 이러한 책을 읽고나면 거대한 자연과 과학 앞에서는 겸허해져버리게 됩니다.

우리네 삶은 허무함으로 가득합니다. 많은 것들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의 역량과 한계는 부모가 물려준 DNA의 소산입니다. 나를 에워싼 가족과 주변환경, 문화, 국가, 그리고 시대가 나의 행동 반경을 제약하기도 하고 넓혀주기도 합니다. 드라마 『스물 다섯, 스물 하나』 1화에서 주인공인 나희도는 IMF로 인한 고교 펜싱부 해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코치는 "네 꿈을 뺏은 건 내가 아냐. 시대지."라고 말합니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주인공 존 앤더튼은 예언자들의 예지를 알고 이를 거스르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방아쇠를 당깁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져야 할 삶의 태도에 대해

그러나 저자는 같은 장에서 "측정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 안에서 이전 상태의 정보는 모두 없어지"므로 "라플라스의 악마라도 우주에 대한 완벽한 정보를 가질 수는 없다"는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과,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므로 "시간이 흐르면 우주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열역학 제2법칙을 상기시킵니다. 정해져있는 것들을 알 수 있는 길은 결코 없고, 측정을 통해 알아낸다한들 그 측정은 이전 상태의 정보를 없애버립니다. 그러니 우리가 맞닥뜨릴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지만 우리가 알 수 없는 상태가 유지됩니다. (이것은 사주를 보고 나서 그에 따라 나의 행동이 바뀌거나 이를 고려하여 의사결정을 내리는 뭐 그런 느낌적 느낌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비과학적인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나의 운명도 또 삶의 결말도 이미 모두 정해져있을지언정, 우리는 결코 그 운명을 알 수 없다라니. 인간의 삶에 대한 과학적이고도 동시에 철학적인 해석 앞에서 잠시 코끝이 찡해지기도 낭만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하고 또 심지어 설레기도 합니다. 이미 내정된 그러나 죽을 때까지는 알 수조차 없는 거대한 열린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운명처럼 마주친 행복 앞에서는 겸손하고도 감사한 마음을 갖되, 시련과 실패 앞를 개척하고 극복하는 것 또한 나의 운명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정말 멀고도 먼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과학 책을 투덜거리며 읽다보니, 어느새 앞으로 삶을 살아가야 할 태도와 방식에 대한 통찰을 얻어갑니다.

(결정론, 그리고 자유의지와는 조금 관계가 덜하지만) 책 속에서 재미나게 읽은 구절들

1. 많은 독자들이 알고 있겠지만, 포스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다. 요다를 비롯한 제다이들은 포스의 밝은 면을 이용해 이타적인 선을 실현하고, 다스 베이더를 비롯한 시스들은 포스의 어두운 면에 빠져서 이기적인 악을 퍼트린다. 다른 많은 이야기들처럼, <스타워즈>도 결국 선과 악의 대결이다.

2. 그럼에도 포스에는 나름대로 심오한 점이 있는데, 밝은 면인 선과 어두운 면인 악이 서로 다른 힘이 아니라 동일한 힘의 서로 다른 면이라는 점이다. 다스 베이더도 원래 선한 인물이었던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포스의 어두운 면에 이끌려 탄생한 것이다. (아내의 죽음을 자신이 막지 못한다는 것을 예지하고, 죽음을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을 갈구하다가 결국 포스의 어두운 면에 빠진다.)

3. 결론부터 말하면, 힘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힘은 그저 존재하기 위한 노력일 뿐이다. 이제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저 존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개체들이 자발적으로 선해질 수 있을까?

4. 팃포탯의 전략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특징이 있다.

선량함: 절대로 먼저 배신하지 않는다.
단호함: 상대방이 배신하면, 단호하게 보복한다.
관대함: 상대방이 협력의 손을 내밀면, 관대하게 용서하고 곧바로 협력한다.
명료함: 상대방이 내 전략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함으로써 상대방의 현명한 선택, 즉 협력을 유도한다.

5. 재미있게도 이 네 가지 특징은 고득점에 속한 다른 프로그램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었다. 사실, 팃포탯이 우승한 이유는 이 네 가지 특징을 모두 가진 유일한 전략이 바로 팃포탯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아, 갑자기 인생의 교훈을 배운 느낌이다. 착하게 살자. 하지만 나쁜 사람에게는 단호하게 대처하자. 그리고 혹시라도 나쁜 사람이 다시 착해지면 관대하게 용서하자.

6. 거의 모든 참여자들이 악한 전략을 취하는 생태계나 사회에서도, 소수의 선한 그룹이 팃포탯 전략을 지속적으로 구사한다면 결과적으로 그들은 전체를 지배하는 주류가 될 수 있다. 실제로 계산해 보면, 팃포탯은 전체 구성원의 단 5%에게만 선택되어도 시간이 흐르면 전체 집단을 지배하는 주류 전략이 된다. 결국에는 선한 사람이 이긴다는 것이 수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7. 악한 전략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도 선한 전략들이 돌연변이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선한 전략들 가운데 팃포탯은 시작이 아주 미약하더라도 그 끝에는 모든 악을 이기고 집단을 지배하는 주류 전략을 차지할 수 있다. 다시 선한 세상이 돌아오는 것이다.

앗, 이것은 <스타워즈>의 줄거리 아닌가?

양자역학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이 책보다는 다른 책으로 스타트를 끊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하지만 이 책 역시 저자의 영화를 포함한 여러 분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식견, 그리고 애정 덕에, 무척이나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저는 트레바리 독서모임에서 클럽장 님과 멤버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크게 도움을 받기도 하고 또 나만 답답했던 것은 아니었구나 하며 위로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무척이나 즐거운 독서이자 독서모임이었습니다.

뉴스레터를 읽으면서 아쉬웠던 것, 떠오른 것, 무엇이든 좋습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남겨주시면 감사히 읽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곧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