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회고하는 방법 정하기에서 썼던 것처럼, 2024년 한 해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먼저 월별로 나누어 기록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폰 사진첩 속 사진과 표정들, 구글 캘린더에 넣어둔 일정들, 노션에 써둔 일기와 메모들을 살피다보니 당시의 기억들도 감정들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2024년 2월 즈음부터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는데 10월 즈음부터 멈춰버린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나마 뉴스레터로 보내는 주간 회고 기록들이 남아있으니 다행이긴 하다. 순간순간 사람들과의 대화도 참고가 될 수야 있겠다만 거기까지 살피기에는 여력이 닿지 않는다. 새해에는 다시 일기를 간단히라도 써봐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과거를 살피는데 많은 도움이 될테니까.

아래는 2024년 월별 기억에 남는 사건들과 순간들. 내용이 기니 주의.

• 베트남으로의 휴가. 조용히 다녀왔다. 수영을 많이 했고 글도 많이 썼고 책도 많이 읽었다. '승려와 수수께끼'와 '에고라는 적', '30년만의 휴식'을 가져갔고, 모두 재미나게 읽었다. 특히 앞 두 권은 오래오래 두고 다시 볼만한 책이다. 덕분에 생각 정리가 많이 되었다.
• 퇴사 희망 메일 작성. 휴가의 막바지에 퇴사 희망 메일을 쓰기 시작했고, 돌아와서 다가온 주말에 발송 버튼을 눌렀다. 
• 심리상담 시작. 4월 마지막 주부터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격주로 받았고, 7월부터는 매주 받고 있다. 성장이라는 키워드가 왜 내게 유독 중요한지, 왜 스스로의 감정을 살피기보다는 억누르거나 외면하는지, 이런 성향이 어디서 왔고 타인과의 관계에 어떤 좋고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를 계속 알아가는 중이다. 때론 민망하고 부끄러운 순간들도 많지만, 전반적으로는 즐겁고 계속 호기심이 동한다.

• 퇴사 일정 확정. 퇴사 희망 메일을 쓰면서, 무엇이 해결되거나 해소된다면 퇴사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을 많이 했었다. 더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었다. 붙잡히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아 긴 메일을 썼고, 희망 퇴사일자로는 6월 말을 넘기고 싶지 않다고 적었다. 긴 기다림 끝에 받아들여졌다.
• 안타까웠던 신규 프로젝트 런칭 회고. 2월에 런칭했던 신규 프로젝트를 1차로 갈무리하는 회고 미팅에서,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개선하면 좋을 점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런데 정작 전사 공유 발표에서는 실무자 회고 미팅에서 나눈 이야기들이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프로젝트를 조기에 성공으로 결론짓는 느낌. 의아한 동시에 안타까웠다.
• 3년 4개월 동안 운영해온 독서모임 중단. 3년 4개월 동안 운영해온 독서모임을 쉬어 가기로 했다. 많이 아쉽지만, 퇴사와 새로운 출발을 결심한 마당이기에 덜어낼 것들은 덜어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밀린 만남들과 새로운 만남들. 퇴사 소식을 전한 이후에 연락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한 달 내내 사람들을 만나느라 바빴다. 감사하게도 커피챗을 청해주신 여러 스타트업 대표님들과도 만났다. 즐겁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 한겨레21 인터뷰. 한겨레21에 글을 기고하고 계신 성은 님이 인터뷰를 청해주셔서 재미난 대화를 나누었다. 생각 정리를 많이 할 수 있었다. (어느덧 너무 예전 이야기가 된 것 같아 다시 공유해보는 링크)
• 도망칠 준비. 여기저기 다니며 사람들 만나고 이야기 하는 것이 너무 즐겁기도 했지만 조금은 버겁기도 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 더불어 사람들을 만나고 계속 흥미로운 제안들에 노출되다보니, 얼른 다시 일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제대로 브레이크를 걸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항공권을 예매했다.

• 3주 동안 유럽 여행 다녀옴. 내버려두면 늘 하던 대로 짧은 여행에 만족하고 돌아올 것 같아서 두 가지 결심을 했다. 편도 비행권과 3일치 숙소만 끊고 즉흥적으로 움직이기, 그리고 적어도 최소 2주는 해외에서 머물기. 결론적으로 3주 동안 런던 - 파리 - 브뤼셀 - 암스테르담을 돌아다니며, 잘 쉬고 잘 놀고 많이 비우고 돌아왔다. F1 네덜란드 그랑프리도 직관하고 왔다. 더 길게 있고 싶었는데 짐도 한국에서 돌봐야 할 것들도 많아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여행하려면 짐이 적어야 한다. 많은 것을 비워야겠다고 다짐했다.
• 영화 '퍼펙트 데이즈'. 런던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본 영화이자 올해의 영화. 히라야마의 정갈한 삶의 루틴, 일을 대하는 장인정신과 고아한 취향에 찬사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까지 하며 성벽을 쌓을 수밖에 없었던 히라야마의 내면은 더 어둡고 깊을 것이라 혼자 생각했다.

• 머리를 짧게 자르고 수염을 길러봄. 유럽 여행 어느 시점부터 면도를 안 하기 시작했는데 그 나름대로 마음에 들어서 뒀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그에 맞춰 머리도 짧게 자르기 시작. 그러나 다시 면도를 할지 말지 고민되는 시점이 찾아오면서, 고민하는데 쓰는 에너지도 아까워져서 다시 깨끗하게 면도했다. 
• 동력수상레저기구 2급 필기 합격. 운하의 도시 암스테르담에서 보트를 타고 도시를 즐기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보트를 몰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동력수상레저기구 2급 필기에 응시했고 한 번에 합격했다.

• 강원도 고성의 매력을 알게 됨. 아야진에 모여 위스키를 왕창 마시고, 바닷가에 나가 별을 보고, 자고 일어나 막국수와 가오리 찜을 먹고 돌아온 즐거운 연휴였다. 강원도 고성의 매력을 알게 된 시간들.
• 수영 상급반 강습 시작. 초등학생때 평영까지 배웠고, 취준생이던 2015년 즈음에 접영을 배웠지만 잊고 지냈었는데, 오랜만에 수영 상급반으로 강습 등록했다.
• 사패산 등산. 의정부에 있는 사패산에 올랐다. 등산 가자며 제안해준 친구들이 있었던 덕이다. 오랜만에 등산했더니 상쾌하고 좋았다. 혼자서도 근처 산에 오르겠노라고 다짐하며 등산복을 샀다. (하지만 이후로는 딱 한 번만 산에 올랐다.)

• 고등학교 동창회와 군대 동기의 결혼식. 오랜 인연들을 많이 만났다. 바빠서 연락도 만남도 뜸했던 반가운 얼굴들. 다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 사이 많은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가족을 꾸리는 모습이 대단하고 멋져보이기도 했다. 친구들이 기억하고 있는 그러나 내 기억에는 없던 사건들이나 기억들, 그리고 인상들을 듣고 나누다보니 고맙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군대 동기들과 그렇게 미팅을 많이 했었다니...) 감사하게도 좋은 모습으로 기억해주는 친구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새로 시작하는 일을 정말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동기부여가 된다.
• 서류상 퇴직 완료. 6월 말에 마지막 출근을 했지만 12월 초에야 서류상 퇴직이 완료되었다. 6년 반 동안 누적된 대체 휴무를 휴가로 다 소진했기 때문이다. 미리 계획된 불가피한 초과 근무와 독서모임 참여(월 1회 한정)를 대체 휴무로 올릴 수 있었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신청하는 것도 귀찮아서 + 어차피 퇴사할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의미냐 생각하며 회사에서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만 대체 휴무를 신청해 올렸다(ㅎㅎ;;) 그랬음에도 근속 연수가 길고 초과 근무한 시간들이 많다보니 휴가가 참 많이 쌓여있었다. 서류상 퇴직일을 지나 월 말에는 퇴직금도 받았다. 주7일 일하며 몸으로 현장을 막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이제 진짜로 퇴사를 했구나 싶어 여러 복합적인 감정도 들었다. 

12월 31일 밤 11시 30분에 차를 몰고 출발해, 1월 1일 새벽 2시 즈음 강원도 고성에 당도했다. 새해 일출을 보고는 워크앤스테이 공간 '맹그로브 고성'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는데에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럴만큼 굵직한 일들과 반추할만한 거리들이 많았던 한 해였다.

월별로 있었던 일들을 추리고 돌아보니 지난 2024년 한 해가 조금 더 입체적으로 만져지는 것 같다. 실은 이보다 훨씬 더 날것이었던 글과 메모들을 정리하느라, 시간을 많이 썼다. 못다 적은 일들도 많지만, 이렇게나마 정리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그간 갈무리되지 않은 채 남아있던 생각과 감정들도 한 번 짚고 넘어갈 수 있어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그나저나 돌아보니 문자로 남은 대부분의 감정들은 화, 짜증, 속상함이었다. 다가오는 2025년에는 새해 다짐으로 매일 감사 일기라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2023년과 2024년은 내게 한 덩어리였다. 마지막 힘을 짜내어 전력을 다했던 2023년이 어떻게 다시 돌아오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덕에, 그간 턱끝까지 차있었던 조급증, 욕망, 기대감, 의지치 같은 것들을 많이 내려놓을 수 있었다. 2024년 한 해에는 조금 힘을 빼고 관조적인 자세와 태도를 지니는 대신 굵직한 의사결정들을 많이 했다. 참 많은 배움이 있었고, 이 배움들이 앞으로의 삶에서 의미있는 경험 근육으로 오래 남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