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에는 운동 일정 빼고는 약속을 잘 잡지 않는다. 운동 일정도 빠지거나 늦을 때가 종종 있다.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일요일에는 가급적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혼자 보낸다. 덕분에 금새 몇 안되는 슬롯이 약속으로 금방 가득 차게 되고, 주말에 어디론가 다녀오려거든 미리 큰 마음을 먹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아니면 이미 잡힌 일정들을 어렵게 조정하거나.

10월에는 긴 추석 연휴 덕분에 즉흥적으로 2박3일의 캠핑을 떠날 수 있었다. 연휴 직전에야 추천받은 태안의 한 캠핑장을 예약하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온갖 캠핑 용품을 트렁크에 쑤셔넣고 출발. 어찌저찌 이게 되네? 조용히 휴식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규칙들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당도하자마자 얼렁뚱땅 텐트와 타프를 치고는 삼겹살을 구웠다. 첫 점을 입에 넣는 순간 참 잘 왔구나 싶었다. 이 순간을 오래오래 기억하겠구나 생각했다. 타닥거리는 참나무 장작 넣으며 불멍하고는 텐트에 누웠다. 360도에서 서라운드로 들리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어렸을 적 부모님 따라 캠핑을 많이 다녔다. 요새는 캐빈하우스라 불리는 대형 텐트 하나, 돔 텐트 하나 가지고 계곡으로 피서를 떠났다. 파라솔 펼쳐두고 고기 구워먹고 계곡 물에 뛰어들며 놀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힘들고 지쳤을 때 캠핑을 가보겠노라고 용품들을 사모으기 시작한 것, 그리고 즉흥적으로 캠핑을 떠나온 것, 혼자 별다른 도움 없이도 척척 2박 3일을 지낼 수 있었던 것 모두가 어렸을 적의 경험 덕이겠다.

흥미를 느끼는 것들, 결핍을 느끼고 게걸스럽게 사고 모으는 것들, 그리고 흥미가 별로 없는 것들 대부분이 어린 시절의 나의 세계와 맞닿아있다. 유전자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와 취향,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좋고 나쁜 경험들을 나도 모르게 물려받았다 싶다. 어쩌면 언젠가는 나의 뭔가들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정부분은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이의 몫이겠지만 그럼에도 그런 날이 온다면 후회없이 최선을 다해 좋은 것들을 물려주고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워런 버핏은 중요한 것 25개를 적고, 그 중 가장 중요한 5개를 추리고, 나머지 20개는 지워버렸다고 한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들을 과감히 무시하고 흐린눈 할 줄 알아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우선순위가 잘 정렬되어 있지 않으면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해서 결국은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리니까. 

9월 한 달을 보내며 정말 많은 일을 했지만, 돌이켜보니 전선이 너무 넓어진듯 했다. 우선순위를 매기고 매일매일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덩어리 일에 얼마나 시간을 썼는지를 중심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의식적으로 이 두 가지 일에 집중하려니, 반대로 순식간에 그 바깥의 일들에 집중력을 빼앗기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성인 ADHD 검사라도 해봐야 하나 싶을 정도로 산만한 마음을 부여잡으며 한 달을 보냈다.

여기저기 난 산불과 들불들을 끄러 다니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산불과 들불은 못본 척 하고 집을 짓는데에 집중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전자도 후자도 오답은 아니다. 그저 역할이 다를 뿐이지. 다만 굳이 따지자면 최근 몇 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전자의 역할로 일했다. 새롭게 일하게 된 회사의 상황도 맡게 된 조직도 내게 후자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수비수에서 공격수로 모드를 전환하는 과정에서 애를 먹고 있는 중이다 싶은 요즘이다. 

한동안 끊었던 연애 리얼리티 예능을 다시 시작했다. '환승연애'는 5쌍의 이미 헤어진 커플들이 3주 동안 시간을 보내는 연애 리얼리티 예능이다. 3주가 지나고 찾아오는 선택의 순간 앞에서, 어떤 커플은 재회를 택하고 어떤 이들은 새로운 인연을 택한다. 이 흥미진진한 포맷, 어떻게 참는건데.

많은 연애 리얼리티 예능이 인기를 얻음과 동시에,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은 이들의 데뷔처가 되어가면서 서서히 수명을 다하곤 한다. 카메라 앞에서, 그리하여 수많은 대중 앞에서 일상생활과 썸-연애로 이어지는 모습을 샅샅이 공개하게 되는 프로그램에 응한다는 것 자체가 남다른 용기와 리스크 감수를 필요로 하고, 그렇기에 출연을 응하는 대부분은 인플루언서로의 유명세를 기대하는 것 같다. 시즌을 거듭하며 출연자의 진정성에 대한 논란과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환승연애 또한 이러한 구도를 완전히 피해갈 수야 없겠지만, 제작진이 커플 중 한 명을 섭외하고 그의 ex에게 연락하게 되기에 더 흥미로운 그림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어서 출연을 원하는 ex를 돕기 위해 - 또는 재회를 염두에 두고 출연한 일반인이 절반 가까이 되니까. 덕분에 이번 시즌에도 날 것에 가까운 흥미로운 장면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환승연애라는 상상 속 우주를 보면서, 만일 옛 연인과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행동할지를 가끔 상상해보게 되었다.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무심해졌던 말과 행동들, 사소한 오해를 풀지 못한 채 이별하는 연인들의 모습들도 모두 남의 일 같지 않다. 완전히 이별했다고 생각했다가도 눈앞에 나타난 ex 앞에서 질투인지, 미련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감정으로 출연자들은 흔들리고 또 무너진다.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또 거쳐 어떤 커플은 재회를 선택하고, 또 어떤 출연자들은 이미 헤어진 연인과의 이별을 비로소 인정하고 각자의 다음 단계로 떠나갈 수 있게 된다. 지난 3개 시즌의 출연자들이 그러했고 또 현재진행형인 시즌4도 그럴테다.

이들의 이별 이야기 그리고 이별 이후에도 이어지는 수많은 다툼들을 엿보다보면, 되려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을 더 아끼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의 삶이 더 풍요로워지고, 언제고 망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더 겸손하게 미래를 대비할 수 있게 되듯이.

추석 연휴 덕에 일한 날도 많지 않았는데, 이래저래 바빴고 생각도 많았던 한 달이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 밀도높은 일의 시간이 주는 도파민을 즐겼다. 몸과 마음이 꽤나 고통스럽기도 했고, 동시에 즐겁고 짜릿하기도 했다. 10월의 막바지에는 일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고, 그만큼 삶을 많이 돌보지 못했다. 지속가능한 최적의 지점을 찾는 것을 11월의 숙제로 남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