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은 그저 과장인 줄 알았다. 전혀 아니었다. 그간 마음 속으로 '칫, 바쁜 척 하기는' 하고 핀잔을 보내었던 여러 친구들에게 뒤늦은 내적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 퇴사 2주차였던 한 주를 정말 정신없이 보냈다. 단체 식사나 번개 자리를 제외하고도 1-3명 내외의 소그룹으로 총 열다섯 분을 만났고, 7일 중 5일 동안 술을 마셨다. 성수와 연남동, 강남구청과 광화문, 여의도와 판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소를 오갔다. 평일 낮과 저녁에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는 경험이 오랜만이라 즐겁고 또 반가웠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모든 순간이 반갑고 즐겁고 감사하며 많이 배우는 순간들이었다. 그러니 불러주시고 찾아주시는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가득 안고, 이렇게 보낼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시간들을 즐겨보기로 한다. 놀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놀아주세요(?). 그와 별개로 항공권을 끊고, 혼자만의 시간도 충분히 확보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2.

미국에서 MBA 재학 중인 친구와 줌으로 미팅을 했다. 최근 몇 년 간은 교류가 뜸했었는데, 퇴사 소식을 접하고는 그 이유도 또 앞으로의 계획도 궁금하다며 물어봐주었다. 1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알차게 대화를 나누었다. 창업자로 오랜 시간 일했던 그의 질문에 고민하고 대답하다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지난 10년 간의 시간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생각나는 사건들. 그로부터 배운 것들. 그 시간들을 거치면서 알게 된 나의 장점과 단점들. 그와의 대화를 마치고 다음을 기약하며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새 문서를 열어 굵직한 사건들과 기억들을 적어보기 시작했다. 부끄러운 기억들도 참 많다. 배움으로 잘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3.

앞선 메일 퇴사 후 5일에 썼듯, 충분히 숙고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서 최소 3개월 동안은 아무런 의사결정도 하지 않기로 혼자 다짐했었다. 더불어 백수로 지내는 기간을 최장 1년으로 한정지어두고, 그 안에 새로이 하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다시 취업의 길을 택하기로도 다짐했었다. 그런데 지난 한 주 동안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벌써 빠르게 실험해보고 싶은 가설이 생겨나고 있다. 조금씩 몸이 근질거리지만, 적어도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잘 참으며 묵혀놔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떠오르는 생각들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잘 적어두고 잊지 않기로.

4.

그간은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을 뉴스레터로 보내다보니, 보내는 나 조차도 내용이 가늠이 안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이 뉴스레터를 조금 더 잘 운영하고 싶어서 어떤 방식으로 콘텐츠를 정리하고 발행할지에 대한 초안을 짜고, 조금씩 실행해보고 있다. 읽은 책의 발췌문과 그에 대한 코멘트를 정리한 Highlight, 흥미롭게 읽은 아티클을 큐레이션한 WWR, 그리고 한 주 동안 떠오른 생각을 글로 쓴 TMI를 각각 주 1회씩, 그리하여 매주 총 3편의 뉴스레터를 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계속해서 더 가치있는 큐레이션과 발췌, 그리고 생각들로 찾아뵐 수 있기를.

5.

"육헌 씨는 성장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한 사람 같아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성장을 꼭 해야 하나요? 그게 스스로를 너무 지치게 하지는 않나요? 왜 성장하고 싶은건가요?" 어제는 상담 선생님으로부터 위와 같은 질문들을 받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한 나의 대답들이 상담 선생님에게 가닿지 않아서, 그를 이해시키는데에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언제나 몰아치듯 경쟁하고 성장하려 애써온 시간들이, 나와는 다른 사람들을 그저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데에 방해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다른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해 생긴 간극들이 경쟁에서의 승리와 성장을 가로막기도 하는 것 같다. 아마 누군가에게는 당연했을 것들을, 뒤늦게 깨닫고 배우고 있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