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세계에서 우리는 유용해야 한다. 지나치게. 유용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만큼 자야 하고, 유용한 활동을 할 수 있을 만큼 먹어야 하고,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쉬는 데에도 유용함은 빠지지 않는다. 오죽하면 휴가의 목적을 '리프레쉬'라고 말하겠는가. 리프레쉬. 단어가 프레쉬해 보인다고 속으면 안 된다. 실은 일하기 좋은 상태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평가의 기준은 언제나 우리의 유용함이다. 그러니 일상 속에서 꿈꾸는 사치는 이런 것이다. 햇빛 아래 맛있는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책을 읽거나 멍하니 먼 곳만 보거나 지나가는 사람들만 구경하거나 그러니까 있는 대로 여유를 부리는 텅 빈 시간, 한껏 무용한 시간.

2.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한껏 무용해지자 마음을 먹는다. '아무것도 안 할 거야'라며 짐짓 호탕하게 말해본다. 하지만 여행지에 도착하는 순간, 마음에는 다시 유용함이란 기준이 자리잡는다. '언제 또 올 수 있겠어?'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것도 못 보면 아깝잖아.' 등등 유용함은 각종 핑계를 달고 여행 한가운데에 뻔뻔하게 자리잡아버린다. 그리하여 '무용하자'라는 다짐이 무색할 정도로 여행자의 스케줄은 봐야 할 것, 가야 할 곳, 먹어야 할 것, 사야 할 것 등등 유용한 것들로만 빼곡히 들어차게 된다. 무용하고 싶지만 무용한 시간을 견딜 힘이 우리에겐 없는 것이다. 

3.

한 아저씨가 눈에 띄었다.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며 커다란 분수에 혼자 발을 담그고 있는 아저씨였다. 여름 한낮 디종은 그야말로 고요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렸고, 태양은 가공할 만한 위력으로 내리쬐고 있었고, 카페 차양 아래 사람들이 앉아 맥주를, 와인을,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목적도 없고, 방향도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텅 빈 시간이었다.

4.

문득 깨달았다. 아, 내가 이 순간을 정말로 그리워하겠구나. 파리보다도, 남프랑스보다도, 더 그리워하겠구나. 유명한 관광지는 그리워하지 않아도 이 광장은 그리워하겠구나. 특색 없는 이 맥주가 간절해지는 순간이 오겠구나. 아무것도 아닌 이 카페가, 지금 이 기분이, 나른함이, 이 속도가, 저 멍한 시선이,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이 모든 무용한 시간이 그 무엇보다 그리워지는 순간이 오겠구나.

5.

예감은 정확했다. 바쁘게 회사 일을 하다가 문득, 밥을 먹다가 문득, 지하철 안에서 문득, 이상하게도 문득문득 생각나는 것은 그런 순간들이다. 너무 아무것도 아니라서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순간들. 그리하여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그리움들. 이런 그리움이 유난히 지독한 날에는, 약이 없다. 다시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다. 유용한 시간을 그만두고 무용한 시간을 찾아 길 위에 다시 설 수밖에 없다.

 - 김민철, 『모든 요일의 여행』

지지난 TMI(링크)에서 썼던 것처럼 즐거운 추억이 쌓이고 쌓여 행복한 삶이 된다는 생각으로, 모인 마일리지를 털어 런던행 항공권을 끊었다. 3일치 숙소를 예약했다. 그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안 하고 지냈다.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하다가 전날인 오늘이 되었다.

부랴부랴 꼭 해야 하는 것들을 챙기느라 분주한 와중에 뉴스레터를 쓰고 있다. 이미 많은 것들을 놓쳐서, 14시간을 버티기에는 꽤나 쉽지 않은 좌석 배치를 받아들고 당황하고 있는 중. 어쨌거나 내일 아침이면 비행기에 오른다. 도착한 다음 날에는 마침 런던 로열 알버트 홀에서 BBC Proms 조성진 공연이 있다던데.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예매를 포기했다. 평소 클래식 음악을 즐겨듣지 않는데, 의무감에 공연장을 찾는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 대신 같은 시간에 열리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보러 갈거다. 그 외에는, 정말 가서 생각하는 것으로.

돌이켜보면 기억에 남을만한 여행의 순간들은 대부분 대단치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오히려 더 생생하고 소중했다. 한인민박 체크인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도착해버린 탓에 캐리어에 발을 얹고 땡볕에서 낮잠을 자다가 손목이 쌔까맣게 타버렸던 파리 튈르리 정원. 나처럼 교환학생으로 비엔나에 왔던 한국인 친구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고민하며 캔맥주를 왕창 비웠던 한낮의 비엔나 보티브 파크. 좀도둑이 객실에 들어오려다 발을 건드리고 도망쳐서 잠에서 깨버린 뒤로는 한숨도 못자고 수다로 밤을 지새웠던 프라하-부다페스트 야간 열차. 제일 싼 라이언 에어 티켓을 찾아 떠나온 크로아티아 소도시에서 만난 아르헨티나 친구와의 바다 수영. 칵테일 왕창 먹고 다이빙했다가 바닥에 부딪혀 피를 철철 흘리며 찾았던 다낭 국제 병원 응급실. 스쿠터 타다 자빠져서 팔꿈치에서 피를 철철 흘렸던 호이안. 뭐 그런 것들. 이 모든 것들이 대단치 않고 무용해서, 오히려 사치스럽고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앞서 인용한 책 『모든 요일의 여행』의 구절들처럼.

여행을 앞두고 『모든 요일의 여행』을 오래간만에 꺼내어 읽었다. 늘 무용한 삶을 살 수야 없겠지만, 너무 오랫동안 오로지 유용함만을 좇았던 것이 아닐까. 꺼내어 들여다 볼 수 있는 추억들을 스스로에게 더 자주 선물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며 새삼 반성하게 되었다. 이번 여행에서 어떤 무용한 순간들을 채워올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아마 그 순간이 되어야만 알 수 있겠지. 또는 그 순간에는 깨닫지도 못하다가 몇 년 뒤에야 찾아올지도. 그러니 유용함에 대한 집착도 계획에 대한 강박도 조금은 내려두고, 발 닿는대로 다녀야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