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일요일 TMI 뉴스레터 발송버튼을 누른 이후, 나가서 선데이 로스트를 먹었다. 영국인들이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나서 돌아와 가족들과 고기를 구워 식사를 하는데에서 유래했다는 선데이 로스트는, 구운 고기와 구운 감자, 그리고 요크셔 푸딩과 야채, 그레이비 소스로 구성되어 있다. 런던 프라이드 생맥주를 곁들여 신나게 식사하고 켄싱턴 가든 정원에 앉아 책을 읽다가 숙소에 들어왔는데, 갑자기 두통과 으슬거림이 찾아왔다. 왜 이렇게 컨디션이 갑작스레 나빠졌지 생각하다 문득 한국음식이 필요한 타이밍이 아닐까 싶었다.

교환학생으로 유럽에서 6개월 지낼 때도 또 여행을 다닐때도 한국음식 없이 잘 지냈을 뿐더러, 한국음식이 필요하다고 몸으로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몸이 한국음식을 부르는 것 같았다.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했다. 그러나 어쩌랴. 빨리 가설을 검증해보자. 이 고통을 빨리 끝내려면, 중식 일식 인도식도 어설픈 한식도 아닌 정말 제대로 된 한식을 먹어야했다. 실패하면 나는 이 밤을 고통 속에서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얼른 우버이츠를 다운받았다. 중식 일식 한식을 섞어 파는 - 사장님이 한국인이 아닐 것 같은 곳도, 왠지 트렌드인 것 같은 K-Street Food 어쩌고도, 사진이 영 수상한 곳도, 배달 속도가 더딘 곳도 거르고 남은 한 곳을 찍었다. 몇몇 식당들의 메뉴를 살펴보면서 메뉴도 자연스레 좁혀졌다. 순두부찌개. 매콤한 국물이 필요했지만, 해외에서 만든 김치, 그리고 그 김치를 끓여 만든 김치찌개에는 불안요소가 많았기에. 순두부찌개(14.9파운드), 공기밥(2.9파운드), 그리고 배달비와 서비스 비용을 더해 20파운드, 3만 6천원짜리 순두부찌개를 주문했다.

순두부찌개 처방의 결과는? 무척이나 성공적이었다. 사실 내 몸은 한국음식을 필요로 했던 것이었어. 어쩌면 여행 내내 무의식적으로 신호를 외면하고 눌러왔을지도. 이번 계기로 인정하게 되었다. 덕분에 의식적으로 펍에 가거나 영국 내지 유럽 음식, 또는 평소 안 먹어본 음식을 먹으려 애쓰는 대신, 흘러가는대로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덜 무리하고 더 자연스럽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해크니 베트남 음식 거리 쌀국수 참 맛있더라!

수요일에는 아침 8시에 일어나서 누운 채로 여행의 다음 행선지를 한참 고민했다. 런던 근교의 소도시들을 살필까.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기네스 맥주를 원없이 마실까. 가본 사람들은 모두 예찬하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로 갈까. 아님 저가 항공을 타고 아무 곳이나 떠날까. 이런저런 안되는 이유들을 찾다보니, 몇 가지 생각들이 남았다.

하나. 위탁 수하물로 부친 20kg짜리 캐리어 하나와 백팩 하나를 들고 출발했었다. 단촐하게 왔다고 생각했는데, 저가 항공을 타려면 매번 이 짐을 들고 공항으로 가야 하고, 위탁 수하물에 추가 금액을 내야하니 저가가 아니게 되어서 고민이 많아진다. 말로는 스마트폰과 여권, 그리고 카드만 있으면 된다고 그렇게 떠들었으면서. 과거에서 가져온 것들이 앞으로의 내 움직임을 제약한다. 다음 여행을 떠날 때는 더 많이 비워서 출발할 것이다. 여행 기간이 길어진다고 내게 필요한 물건의 종류가 드라마틱하게 많아질 이유는 없다. 그리고 그건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일거다.

둘. 안 되는 이유가 많이 떠오르는 만큼, 그 곳에 갈 이유가 적은거다. 진정 가고싶다면 못 갈 이유는 없으니까. 하나하나 뜯고 분석하기보다는 직감에 따라보기로 했다. 가고싶은가, 가기싫은가.

셋. 중요한 것은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지, 선택지를 다양하게 유지하거나 늘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딱히 목표가 없을 때는 선택지를 늘려두는 방향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목표가 없는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는 것은 좋지 않지만.

그렇게 모레 오후에 파리로 가기로 정했다. 다음 숙소는 한인 민박이다.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 묵었던 숙소가 - 사장 님은 여러 차례 바뀐 것 같지만 - 여전히 운영 중이기에, 그리고 그만한 위치와 가격이 없기에 이곳으로 정했다. 잠시 한국 음식도 충전하고 갈게요 음하하.

3.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

런던에서 만난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는다. 지하철에 앉으면 같은 객차에서만도 서너 명이 페이퍼백 도서를 읽고 있었다. 왜일까? 피크아워에는 지하철도 버스도 붐비지만, 서울만큼은 아니다. 더불어 서로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확보해주는 분위기라, 책을 읽기에 용이하다. 책을 꺼내펼치고 페이지를 넘기려면 공간에도 마음에도 여유가 있어야겠지. (지하철이 상대적으로 덜 붐비는 이유는, 근무 시간이 길지 않고 상대적으로 직주근접성이 높은 도시여서가 아닐까 추측한다. 카나리 워프 같은 곳은 아마 또 다르겠지만.) 더불어 지하철에서 인터넷이 잘 터지지 않아서 딱히 독서 외에는 할 것이 없다. 책을 읽기에 꽤나 괜찮은 환경이다. 새삼 사람들의 행동을 만드는 데에는 정말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는구나 싶다. 한국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게 하려면 누가 무엇을 해야 할까. 어렵다. 참 모를 일이다.

4.마음 받기

약한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는 어른이 안부를 묻는 카톡을 보내주셨었다. 시차로 인해 답이 늦었더니 외국에 있냐고 물어주셨다. 한국에 돌아가면 연락드려 뵙기로 하고 대화를 마쳤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 원래는 퇴사 소식을 듣고 기념으로 맛있는 음식을 사주려 연락을 했는데 언제 올지 모른다고 하니, 괜찮다면 100 유로를 보내도 되겠냐며. 근사한 곳에서 한 끼를 제대로 하라며, 당신의 여행 일정에 한 조각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니 거부하지 말아달라고 말해주셨다. 한국에서 돌아가서는 오히려 내가 식사를 대접하는 조건을 걸고(?) 마음을 받았다. 환율을 원 단위까지 칼같이 계산한 100유로를 카카오 페이로 받았다. 돌아갈 때 근사한 선물을 사가고, 맛난 식사를 대접해야겠다. 이 분은 뭘 좋아하시더라.

5. 루프탑에서 영화 라라랜드를 봤다

런던에서 뭘 하고 놀면 재밌을지 살피다, 루프탑 필름 클럽 런던이라는 곳을 발견했다. 원래라면 휑-했을 카파크(주차장 전용 건물)의 루프탑을 개조해 영화를 상영한다. 펍이니 푸드 스톨이니 가득한 명소로 탈바꿈시켜둔 것이 인상적이라, 예매를 해봤다. 자막 없이 보는 영화이니 기왕이면 이미 봤던 영화인 것이 조금 편하겠지 싶어, 라라랜드를 골랐다.

날씨가 우중충한 것은 아쉬웠지만, 영화는 역시나 훌륭했다. 영화관에서 라라랜드를 봤을 때는 엔딩을 무척 마음에 안 들어했었다. 일과 사랑에서의 성취를 동시에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제는 그때의 생각이 순진하고 동화같은 생각이라는 걸 안다. 시간이 지나 많은 것들을 이룬 후, 한때 교차했지만 이제는 가는 길이 달라져버린 사랑과 마주쳤을때 과거를 추억하며 웃어보일 수 있다면 이마저도 해피엔딩이 아닐까 싶다.

6. 여행의 이모저모

8월 8일부터 16일까지 9일을 런던에서 보내고, 16일(금)부터는 파리.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망설임을 끝내고, 24일(토), 25일(일) 양일 암스테르담 근교 잔드보르트 서킷에서 열리는 F1 네덜란드 그랑프리 티켓을 끊었다. 그에 맞춰 일정을 짜다보니 20일(화)에는 벨기에 브뤼셀로 넘어가야겠더라. 23일(금)부터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매일 하루살이로 지내다가 일주일치 이동과 숙박 예약을 끝내고 나니 오래간만에 마음이 편하기도 하고, 괜스레 아쉽기도 하다.

이렇게 얼렁뚱땅 시작한 여행이 열흘을 넘어가고 있다. 2주 넘게 여행한다면 성공일거라 생각하며 출발했는데, 별다른 일이 없다면 2주를 넘기게 될 것 같다. 목적도 목적지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이 반갑다.